술에 취해 성폭행, 임신까지... 증거가 없는데 고소할 수 있나요?
믿었던 지인과 함께한 술자리, 과음으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의 그 끔찍한 기분. 그리고 얼마 뒤 찾아온 절망적인 소식. 원치 않는 임신과 성병. 결국 혼자서 고통을 감내하며 임신중절수술까지 받아야 했던 그 시간은 피해자에게 평생의 상처로 남습니다.
그런데 가해자는 “합의된 관계였다”, “술에 취해 기억 못 하는 것 아니냐”며 뻔뻔하게 책임을 회피합니다. 명백한 성폭행이지만, 술에 취해 기억은 희미하고, 폭행이나 협박의 흔적 같은 직접적인 성폭행 증거는 없는 상황. 이런 막막한 상황에서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성폭행 신고를 결심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늘은 위와 같은 가상의 사연을 통해, 직접적인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어떻게 준강간 혐의를 입증하고 가해자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가상의 사연: 지워지지 않는 악몽
직장인 수진 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지인과 저녁 식사를 하며 술을 마셨습니다. 평소보다 과음한 탓에 필름이 끊겼고, 다음 날 아침 낯선 곳에서 눈을 떴을 때의 충격과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옆에는 지인이 있었고, 수진 씨는 전날 밤 원치 않는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습니다.
며칠 후 몸에 이상을 느껴 찾은 병원에서 수진 씨는 성병 진단과 함께 임신 사실을 통보받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수진 씨는 홀로 고통 속에서 임신중절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용기를 내어 지인에게 따져 물었지만, 그는 “너도 동의하지 않았냐”, “기억 안 나냐”며 발뺌할 뿐이었습니다.
수진 씨는 가해자를 처벌하고 싶지만, 술에 취해 저항하지 못했고, 당시 상황을 명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성폭행 신고를 망설이고 있습니다. 과연 수진 씨는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을까요?

2. 첫 번째 쟁점: 술에 취해 저항하지 못했다면? ‘준강간죄’의 성립
많은 분들이 성폭행은 폭행이나 협박을 동반해야만 성립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형법은 ‘준강간죄’라는 처벌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형법 제299조(준강간, 준강제추행)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는 제297조(강간)의 예에 의하여 처벌한다.
여기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란, 정신 기능의 장애로 정상적인 판단 능력이 없거나,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를 의미합니다(대법원 2021. 2. 25. 선고 2018도7190 판결).
즉, 피해자가 술에 만취하여 의식을 잃었거나, 의식은 있더라도 정상적인 판단과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였다면, 가해자가 이러한 상태를 이용하여 성관계를 한 행위는 ‘준강간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수진 씨처럼 과음으로 ‘필름이 끊긴’ 상태는 명백히 준강간죄의 구성요건인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3. 두 번째 쟁점: 직접 증거가 없을 때, 어떤 ‘성폭행 증거’를 모아야 할까?
성범죄는 그 특성상 목격자나 CCTV 영상과 같은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피해자들이 고소를 포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직접 증거가 없다고 해서 처벌이 불가능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법원은 피해자의 일관되고 구체적인 진술과 함께, 이를 뒷받침하는 간접 증거들을 종합하여 유죄를 판단합니다.
특히 최근 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을 바탕으로, 성폭행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여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대법원 2018. 10. 25. 선고 2018도7709 판결).
따라서 다음과 같은 간접적인 성폭행 증거들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 ① 피해 사실을 입증하는 객관적 자료
- 산부인과 진료 기록: 원치 않는 임신 진단서, 임신중절수술 확인서, 성병(STD) 검사 및 치료 기록 등은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피해자가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매우 강력한 증거입니다.
- DNA 감정 결과: 사건 직후라면 가장 좋지만, 시간이 지났더라도 당시 입었던 옷이나 침구류 등에 가해자의 DNA가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DNA가 검출되지 않았다고 해서 성관계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가해자의 DNA가 검출된다면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 ② 사건 전후의 정황 증거
- 가해자와의 대화 기록: 사건 직후 가해자와 나눈 카카오톡, 문자 메시지, 통화 녹음 등은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가해자가 “미안하다”, “실수했다”, “술김에 그랬다” 등 범행을 암시하는 말을 하거나, 회유 또는 협박하는 내용이 있다면 유죄 인정의 핵심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가해자가 범행을 부인하더라도, 대화의 전체적인 맥락과 피해자의 추궁에 대한 가해자의 반응 자체가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 주변인 진술: 사건 직후 친구, 가족, 상담사 등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다면, 그들의 진술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언제, 누구에게, 어떤 내용으로 이야기했는지 정리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 CCTV, 결제 기록 등: 사건 당일 가해자와 함께 술집에 들어가거나, 모텔 등 숙박업소로 들어가는 모습이 담긴 CCTV 영상, 술값이나 숙박비를 결제한 신용카드 내역 등은 당일 두 사람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자료가 됩니다.
- ③ 피해자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증거
- 정신과 상담 및 진료 기록: 성폭행 피해로 인한 우울증, 불안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면, 해당 진단서와 진료기록은 범죄로 인한 피해의 심각성을 입증하는 자료가 됩니다.
- 피해자의 일기, 메모 등: 사건 이후 심경을 기록한 일기나 메모 등도 피해자의 고통을 보여주고 진술의 일관성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4. 세 번째 쟁점: 무고죄 역고소가 두렵다면?
많은 가해자들이 성폭행 신고를 당하면 “무고죄로 맞고소하겠다”며 피해자를 협박합니다. 이 때문에 정의를 구하려던 피해자가 오히려 위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폭행 고소 사실에 대해 불기소 처분이나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무고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대법원 2019. 7. 11. 선고 2018도2614 판결). 무고죄는 신고 내용이 객관적 사실에 반하는 ‘허위’라는 점이 적극적으로 증명되고, 신고자가 허위임을 ‘알면서도’ 고소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성립합니다.
법원은 성폭행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무고죄 성립을 매우 엄격하게 판단하므로, 억울한 피해를 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가해자의 협박에 굴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5. 결론: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고 전문가와 함께 대응하세요.
지인에 의한, 특히 술에 취한 상태에서의 성폭행은 피해자에게 깊은 배신감과 자책감을 안겨줍니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내가 거절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에 고소를 망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것은 명백한 범죄(준강간)입니다.
둘째, 직접 증거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일관된 진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간접 증거, 정황 증거만으로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습니다.
셋째, 망설이는 순간에도 증거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건 직후의 의료 기록, 가해자와의 대화 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보하기 어려워집니다.
성범죄는 초기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혼자서 이 모든 고통과 법적 절차를 감당하려 하지 마십시오. 성폭행 신고를 결심했다면, 고소장 접수 전 반드시 성범죄 전문 변호사와 상담하여 내가 가진 성폭행 증거들을 검토하고, 체계적인 법적 대응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당신의 잃어버린 존엄과 일상을 되찾기 위한 첫걸음, 지금 바로 전문가의 손을 잡으시길 바랍니다.

변호사에게 자주 묻는 질문 (FAQ)
Q1. 성폭행을 당하고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지금이라도 고소할 수 있나요?
A. 네, 가능합니다. 강간죄 및 준강간죄의 공소시효는 10년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증거 확보가 어려워지고 가해자 처벌 가능성이 낮아질 수 있으므로, 가능한 한 빨리 법적 조치를 시작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Q2. 가해자와 나눈 카톡 대화를 이미 지웠는데 복구할 수 있나요?
A. 디지털 포렌식 기술을 통해 삭제된 데이터를 복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섣불리 직접 복구를 시도하기보다는,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접수하여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증거를 확보하거나 변호사의 조력을 받아 증거보전신청 등을 진행하는 것이 안전하고 효과적입니다.
Q3. 임신중절수술 기록이 저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나요?
A.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치 않는 임신과 그로 인한 임신중절수술은 성폭행으로 인해 발생한 매우 중대한 피해 결과입니다. 이는 가해자의 범죄 행위로 인해 피해자가 얼마나 큰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는지를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로 작용합니다.
Q4. 변호사 선임 비용이 부담스러운데, 꼭 필요한가요?
A. 성범죄 사건은 수사 초기 단계의 진술이 재판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변호사는 고소장 작성부터 경찰 조사 동석, 증거 수집, 재판 진행까지 전 과정에서 피해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2차 피해를 방지하며, 법리적으로 가해자의 혐의를 입증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대한법률구조공단 등을 통해 법률 지원을 받는 방법도 있으니, 혼자서 대응하기보다는 반드시 법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시길 권합니다.
면책공고
본 내용은 일반적인 법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법률적 자문이나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별적인 법률 문제에 대해서는 반드시 변호사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