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다고 했는데… 장난이었다고요?" 성범죄, '항거불능'과 '성인지 감수성'의 모든 것
출처: “소극적 저항은 동의” 무죄 논리 사라져…강간죄 ‘항거불능’ 기준 재정립됐다
“싫다”, “하지 마세요”.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상대방이 이를 무시하고 성적 접촉을 강행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과거 일부 판결에서는 피해자의 저항이 격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해자의 행위를 ‘오해’나 ‘장난’으로 치부하며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피해자에게는 평생의 상처가 되는 끔찍한 경험이, 법정에서는 ‘애매한 신호’로 해석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법원의 흐름은 명백히 달라지고 있습니다. 대법원이 수차례 강조한 **’성인지 감수성’**이 하급심 판결에 적극적으로 반영되면서, ‘피해자다움’이라는 낡은 통념에서 벗어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 실제 판례를 통해, 성범죄 사건에서 ‘거부 의사’와 ‘항거불능’ 상태가 어떻게 해석되고 있으며, 무죄가 유죄로 뒤집히는 결정적인 증거는 무엇인지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피해자다움’이라는 편견을 넘어: 성인지 감수성이란?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 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23. 1. 12. 선고 2022노28 판결 등). ‘성인지 감수성’이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해자 중심적 문화와 잘못된 통념으로 인해 피해자가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가 사건 직후 가해자와 평소처럼 대화했거나, 곧바로 신고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것은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판단일 수 있습니다. 피해자는 충격과 공포,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이제 이러한 특수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여 사건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2. Case 1: “살려쥬” 카톡 한 통이 뒤집은 무죄 판결 (인천지방법원 2021노1162 판결)
노래방에서 만난 남성이 허벅지를 만지다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성기 부위까지 만진 사건입니다.
- 1심 (무죄): “피해자가 명시적으로 거부하지 않아 피고인이 동의한 것으로 오해했을 수 있다.”
- 2심 (유죄): 1심 판결을 뒤집고 강제추행죄를 인정했습니다.
결정적 증거는 무엇이었을까요?
- 실시간 통신 기록: 피해자는 추행을 당하는 동안 친구에게 “살려쥬”, “이새끼 존나 만져낸즈짜” 와 같은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는 피해자가 느낀 공포와 거부 의사를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 피해자의 성향에 대한 이해: 재판부는 “피해자가 착해서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이라는 친구의 진술을 바탕으로, 명시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동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성인지 감수성을 적용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 피고인의 사과 메시지: 사건 직후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불미스러웠던 일은 정말 미안하다”고 보낸 메시지 역시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활용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명확한 물리적 저항이 없었더라도, 실시간으로 남긴 디지털 증거와 피해자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유죄를 인정한 중요한 사례입니다.
3. Case 2: ‘생리 중’인 피해자에게 강행된 성관계, ‘항거불능’의 재해석 (서울고등법원 2019. 8. 20. 선고 2018노3367 판결)
DVD방에서 피고인이 술에 취한 피해자를 강간한 사건입니다.
- 1심 (무죄): “피해자의 저항이 피고인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으로 보기 어렵다.”
- 2심 (유죄): 1심을 파기하고 강간죄를 인정,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습니다.
‘항거불능’에 대한 법원의 시각 변화를 보여준 이 판결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일관된 거부 의사와 물리적 저항: 피해자는 “하지 말라”고 수차례 말했고, 피고인이 바지를 벗기려 하자 손으로 막고 상체를 밀치는 등 저항했습니다. 2심은 이를 ‘밀고 당기기’가 아닌 명백한 ‘저항’으로 인정했습니다.
- ‘항거불능’ 상태의 폭넓은 인정: 재판부는 강간죄의 폭행·협박이 반드시 상대를 완전히 제압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① 피해자가 술에 취해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② 피고인(170cm)과 피해자(151cm)의 상당한 체격 차이가 있었으며, ③ 피고인이 한 손으로 피해자의 양손을 잡고 제압한 행위 자체를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만든 폭행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 성관계를 동의했다고 볼 수 없는 명백한 정황: 피해자가 **’생리 중’**이었던 사실은 성관계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강력한 간접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 판결은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결론: 당신의 “싫다”는 거절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위 두 사례는 성범죄에 대한 법원의 판단 기준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제 법원은 ‘애매한 신호’라는 가해자 중심의 변명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피해자의 거부 의사와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원치 않는 성적 접촉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당신의 잘못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건 직후의 문자 메시지, 통화 기록, 주변인에게 피해 사실을 알린 내용, 병원 진료 기록 등 모든 것이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혼자 고민하지 마시고 법률 전문가와 상담하여 당신의 권리를 지키고 상대방에게 합당한 책임을 물으시길 바랍니다.
변호사에게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강간죄와 준강간죄는 어떻게 다른가요?
A.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을 수단으로 사람을 간음하는 경우 성립합니다. 반면 준강간죄는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하는 경우에 성립합니다(형법 제299조). 예를 들어 술에 만취해 의식이 없거나 잠이 든 사람을 간음하면 준강간죄가 될 수 있습니다.
Q2. 몸에 상처가 없으면 강간죄로 고소하기 힘든가요?
A. 그렇지 않습니다. 위에서 본 판례처럼, 법원은 외상이 없더라도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음주 상태, 체격 차이, 밀폐된 공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저항이 현저히 곤란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력을 다한 저항’이나 ‘눈에 보이는 상처’가 강간죄 성립의 필수 요건은 아닙니다.
Q3. 성폭력 피해를 당한 직후 어떻게 대처해야 증거를 확보할 수 있나요?
A. 가장 먼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후 증거 확보를 위해 가급적 씻지 않은 상태로 병원(해바라기센터 등)을 방문하여 진료 및 증거 채취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친구나 가족 등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고,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자 메시지나 통화 내용은 절대 지우지 말고 보관해야 합니다.
Q4. 사건 발생 후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지금이라도 고소할 수 있나요?
A. 네, 가능합니다. 성범죄는 피해자가 겪는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신고를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법원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공소시효가 남아있다면 고소는 가능합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증거 확보가 어려워질 수 있으므로, 최대한 빨리 법률 전문가와 상담하여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면책공고
본 내용은 일반적인 법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법률적 자문이나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별적인 법률 문제에 대해서는 반드시 변호사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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